2016년 11월 13일 일요일

낙서면



4. 낙서면(落西面)
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23.45㎢, 인구 85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전화리이다. 본래 의령군 지역으로 낙동강서쪽에 있다 하여 낙서면이라 하여 전화·부곡·방계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아근·내제 등 6개 리로 개편되었다. 서쪽 전화리쪽에 매봉 등 산지가 솟아 있고, 동·남·북부를 모두 낙동강이 에워싸서 평지를 형성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오이·참외·파·시금치 등의 채소류를 많이 생산한다. 교통은 면내를 연결하는 군도가 부림면으로 통한다.
문화유적은 내제리에 봉래정(蓬來亭)정곡리에 이감사묘(李監使墓) 등이 있다.
전화(全火)·율산(栗山)·정곡(井谷)·여의(如意)·내제(來濟)·아근(阿近) 등 6개 리가 있다.

율산마을
면소재지에서 오릿길로 동남쪽 마을로 고촌이며 보통은 <밤실>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율곡(栗谷)이라는 촌명을 쓰기도 했지만 해동공자<李珥>의 호와 같아서 한자표기는 율산(栗山)으로 잡았다고 한다.
동남향으로 집터를 잡고 골 따라 길쭉하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옛날부터 건너편 새집봉산이며 큰 골산 등 밤나무가 많고 특히 밤이 잘 되는 터라서 촌명이 되었다고 한다.
동네어귀에(지금은 양수장이 있음)는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 큰 쏘(沼)였다고 하며 보통<등어불><등이포>라고 부르는데 이 등리포(登鯉浦)라는 말이 변음된 것이다. 부친의 병환을 걱정하며 김아해공이 소원을 빌었던 등어불 바로 옆 언덕에<부자려(父子閭)>가 있다.
동네안쪽을 강물과 강 건너 산봉우리가 안 보이게 막아야 동리가 편안하다 해서 숲을 만들고 세칭이(洗淸亭:3그루 성낭목)나무껄에는 지금도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있고 서낭당으로 삼고 동신제를 지내고 있는데 저쪽 산자락까지 숲이 이어져서 여름에는 강이 안 보였다고 한다. 세칭이나무껄 위로 나직한 고개를 밥고개라 하는데 옛날 물이 들 때는 고개 너머 뱃지껄 들은 물이 안드는 옥답이라 농사철이면 밥을 이다 나르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밥고개 옆에 방계재가 있어 방계로 통하는 소로길이 있다.
마을 뒤에는 큰 홰나무가 서 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나는 우물이 있어 새미동천이라 부른다. 새집모양으로 아담하게 생긴 산이라서 새집봉이라 부르고 마을 뒤 큰 골이 있고 내제 감실로 통하는 감실재도 있다. 또 새집봉 끝자락에<따신굼덕>이란 밭들이 있는데 하루종일 볕이 드는 곳이며 1000평 가까운 진배미밭으로 유명하고 <지집 뺏긴 밭>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왼쪽이 절부골인데 옛날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들머리산이 솥뚜껑모양이라 소두방산이고 먼당을 부숫개먼당이라 하며 그 산넘어가 전화리 면소재지이다.
마을 뒤 소두방산의 줄기를 따라 나직한 묏등이 이어지는 서남등에는 철성이씨, 김녕김씨 선산이 있다. 마을 왼쪽에 있는 산을 돌다리산이라 하는데 물이 들 때는 큰 바위로 징검다리를 놓고 건너게 했다고 한다.
이 마을 골안쪽 큰 골 저수지 위에는 주걱모양의 논배미가 한마지기 있어 이 논을 <주개배미>라 널리 알려져 있다.
김녕 김씨가 먼저 터를 잡았다고 하며 지금은 경주 최씨35집, 김녕 김씨25집, 경주 김씨8집, 김해 김씨2집, 밀양 박씨1집 등 70여호이고 등어불의 부자려를 비롯하여 최씨문중의 봉강재(鳳岡齎), 서산재(西山齎), 회산정(晦山亭:옛서당)등이 있다.


여의마을
원래 이곳 지명은<연늪>이었고 낙동강변 마을이라 큰 나루터가 있어서 <연늪나리>(연늪나리-나리는 나루의 토박이말)로 통했다.
옛날 강변 제방이 없던 시절에는 온통 수침지역이었고 군데군데 늪(흔히 못이란 말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다. 늪에는 연 종류의 다년생 수초가 많이 자생했고 한여름동안 화사란 연꽃이 지천이었음을 짐작 할 때 연꽃이 가득한 늪마을,연꽃동네라서<연늪>이란 소지명을 쓴것으로 생각된다. 
<연늪>과 <여의>란 지명은 사실 깊은 연관은 없다. 마을은 양지땀과 음지땀으로 나누어져 있다. 두땀 사이 뒷산의 잘록아지가 내제마을로 통하는 뒷고개라는 산고개이다. 뒷산은 국사당이라는데 제법 넓직한 뻔덕에 큰 고분이 있으며 옛날 큰 벼슬한 사람이 살던 터 이라고 전하고 있다. 호랑이 장배기 자리에 통덕량(조선시대 정오품의 문관벼슬)임여상(林如相)공의 묘가 있다. 
마을뒷산은 국사당이라고 부르지만 당산이 있고 동신제를 지냈다는 곳인바 국사당이란 말이 변음돼 쓰이는것 같다. 동네를 벗어나서 조금 윗쪽에 도수꿈 또는 역노골이란 제법 너른 산골짜기가 있는데 옛날에 역찰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야시방이란 지명은 야사(여우)란 놈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고 절벽 아래 강물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흐르는 곳을 구무덤이(구무데미)라고 말한다. 큰 자연동굴이라 굴덤(구무덤)을 말하는데 안에는 용이 안된 이시미(이무기)가 살고 있어서 배나 사람의 접근을 막았던 곳이라고 한다. 
근수정(近水亭)은 서흥 김씨 재실겸 정자인데 퇴락하여 근년에 중건을 했다. 옛적엔 70여호가 살았던 이곳도 지금은 겨우29세대가 살고 있다. 김씨가 27세대, 담양전씨와 남양홍씨가 한집씩 남아있다.




정곡마을
소재지서 동북쪽 십리길에 정곡마을이 있다. 낙서 정동(井洞)이라고도 부른다. 
옛지명이 <우무실> <우무동> 인데 우물(샘.새미)이란 말의 받침소리 리을(ㄹ)이 탈락한 것이다. 이 마을에는<정자나무 새미>유명하다. 사시사철 마르지도 않거니와 수량도 많아서 동네앞들 수십마지기 논물도 해결했다고 한다. 새미물 좋은 골안 마을이라<우무실>이 된 것이라 한다. 옛기록에 명월담(明月潭)이 있다고 한걸 보면 우물.못.늪 등과 관련이 깊은 곳임이 분명하다. 동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동네 뒤로는 매봉산,학구봉이 감싸고 있는 안산격인 새집봉이 지기를 받치고 있다. 동네는 골땀(골안땀), 웃땀, 아랫땀 등 세뜸으로 옛적엔 대동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큰늪, 작은늪으로 부르긴 하지만 원래는 엄청 큰 늪이었다. 동네 들머리에 정자나무도 좋거니와 누와대가 있는데 풍영대요 풍영정사다. 향사 유림들이 자주 모여서 시회도 열었던 곳이라 한다. 골땀 뒤로는 <두실재>가 있어서 듬실(두곡)로 또 웃땀 뒷산에는 <밤실재>가 있어 율산마을로 통하는 잿길이었다. 안산에 있던 유서깊은 만성정도 전란때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만성정 주인이자 천석꾼 부자로서 널리 알려진 변형규공이 이 마을 사람이다. 소작하는 민초들에게 덕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재해를 입게되면 소작료는 아예 탕감해 주었다. 또 길흉사가 있으면 후한 부조를 하는 등 적선공덕이 남달랐으므로 여러 마을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마을 앞 밭언덕에 돋보이는 꽃집이 있는데 안에는 <초계변형규시혜비>라 새겨진 돌비가 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집안은 밀양 박씨였고 이어서 초계 변씨, 김해 김씨가 들어오면서 큰 동네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박씨가 25가구, 김씨가17가구, 변씨15, 장씨 12가구로서 많은 편이고 최,전,손,진,구,강,이씨등 모두 95가구만 남아있다. 전원 이(李)씨의 사락정(思洛亭),강진 안씨 첨락재(瞻洛齋),김해 김씨의모죽재(慕竹齋)등 재실이 여러 개 있다.





오운마을
낙서면 소재지에서 남서방으로 위치해 있는<오오니>라고 부르는데 한자로는 오은(烏隱)으로 써왔다. 마을 남쪽에 있는 까막재(烏嶺.오령)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때는 운곡(雲谷:굼실)으로 했던 적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지명 정비때 오운(五雲)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내력인즉 이 마을 칠형제 칠천석의 부자형제의 이름 항렬자가 구름 운(雲)자라 두 이복형제를 뺀 채 다섯분의 형제이름자를 따서 동네 이름을 삼았다니 썩드문 예라 할 것이다. 또 저만치 낙동강이 흐르고 동네 뒤에 대덕산(大德山)이 막아 서 있어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지형이라 구름실- 굼실- 운곡으로 부르기도 했다. 칠형제 칠부자집 중 다섯 채가 그대로 보존돼 있고 문중 재실만도 네채나 있다. 까막재 밑에 가락골에는 이름난 <약새미(약물샘)>가 있는데 오래된 마목병도 낫게 하는 약물이 사철 솟아 오른다고 한다. 마을어귀 <부무골>은 풀무간이 있었던 곳이며 <동살미>란 골짜기는 옛날 임씨 장자가 살았던 곳이라 <임장자터>라고 부른다. 대덕산 중턱의 <벼락덤>강가의 <두꺼비여울>등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인 곳이 있다. 이 마을에 먼저 들기는 강씨와 전씨였고 그 뒤 벽진이씨가 들어와서 크게 번성하였고 한시절<벽리만석>이란 말까지 생겼다 한다. 동네 안에는 운곡재, 칠우정, 산사제등 이씨문중 재실이 네채고 경모(敬慕劑)는 담양 전(田)씨 재실이다. 전씨 22가구,벽리 이씨 14가구,최씨4가구,구(具),강(姜),성(成),김(金)씨가 두집씩으로 50세대 안팎 정도 살고 있다.




방계마을
낙서면소재지가 방계마을이다. 법정동리명은 전화리에 속하며 오운, 부곡마을과 함께 3대동이라 했다. 옛날 삼동 한철 빼고는 늘 강물이 범람하는 지역이라 그 재난의 비보책으로 물과 상극대립되는 불을 취한 것이란 생각이다. 방계마을도 <웃방계> <아랫방계>로 두 뜸이고 웃방계가 고촌이지만 지금은 몇집 뿐이고 아랫뜸이 대동이니 완전히 뒤 바뀌어진 셈이다. 마을 뒤에있는 소명산(세명산이라 말함)에 큰 절이 있었는데 절이름이 방사(芳寺)였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방사동> <방동>으로 부르다가 강변 모래톱이 너무 곱다해서 방사(芳沙)로도 썼다고 한다. 그 뒤 임란 후 달성 빈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터의 지기도 약할 뿐아니라 뱃설(행주혈)이라 큰 나무를 마을 가운데 심고 강변쪽(동남방)을 막아야 한다는 풍수설에 따라 계수나무를 심고 동구밖으로 홰나무니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뒤로 삼재가 들지 않고 안가태평 했으며 동리도 번창했다고 한다. 지금 면사무소 입구에 죽은 나무등걸이 있고 새순이 돋아난 홰나무가 있다. 미루어 보건데 처음에 심은 나무가 홰나무인데 창이 비슷하면서 뜻으로 신비스런 계수나무로 고쳤다. 따라서 방계(芳桂)로 변해진 것 같다. 부림면에서 들어가자면 높은 산고개<바람이꼬>를 넘게 되며 그 재밑이 바로 방계마을이다. 내제마을로 통하는 길도 나있다. 웃뜸과 아래뜸 사이에 <걸또랑>이 있어 옛날엔 돌다리가 놓였던 곳이라 한다. 그리고 삼거리지점이라서 등짐장수, 방물장수, 황아장수들이 전을 벌인곳이라서 <전골(점골)>, 방사가 있었던 <절터꿈>엔 샘도 있고 흙기왓장도 발굴된다고 한다. 감실과 율산쪾으로 통하는 <소두방재>(솥뚜껑을 소두방이라함) 와 <정골(솥골)>,<숯골>등 지명이 있어서 그 지형에 맞추자고 불(화)을 동명으로 했겠다는 이야기도 있다. 큰 돌감나무가 있어 <감남골>,땔나무 보탄이라<갓골>, 숟가락모양의 산이라<숫깔산>, 참나무가 지전이라<참남골> 긴 산등성이가 이어진다 해서 <진등산> 등 옛 지명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동남방을 가렸던 동네 숲은 일제때 벌목 공출되어 지금은 서너 그루만 남았다. 한동안 땅콩의 주산지로 유명했던 곳인데 지금은 옥수수와 채소류가 많이 생산된다. 이 동네에 먼저 들어온 성씨는 달성 빈씨고 그 뒤 경주 최.벽진이씨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한편 최씨가 24집이고 벽진리가 8집,박.윤.장씨가 각 대여섯집, 김해.경주. 김녕김씨가 서너집씩으로 두뜸을 합해서65가구다. 문중 재실로 의동정과 방계묘실이 있으며 재밑 산자락에 <벽산 이씨부인 열부비>와 <열부유인 전주 전씨 기적비>가 서 있다. 
1992년 5월에<맑고 깨끗한 마을>로 지정되었다.





당지마을
낙서면 소재지인 방계에서 동북방으로 약 시오리길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여의(如意)라고 자연부락으로는<여꿈>,<당마리>,<감마>란 옛지명의 마을 셋이 포함돼 있다. 
<당마리>가 본동이고 <여꿈>과 <감마>는 작은 협동이다. 한때는 <여귀촌>또는 한자로 요이촌으로 불렀다. 이는 마을 주위의 저습지에 여귀풀이 꽉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여꿈>으로 불렀는바
이는 <옆굼터>마을이라는 말이 줄고 변음되어 <옆굼>이 <여꿈>이 되었으리란 생각이다. 또 <감마>란 말도 본동에서 위쪽에 위치한 뜸이라서 가(변두리,끝)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아새마을>이 <가아말>로 다시 <갓말>이 됐다가 <감마>로 변음되었다는 추징이 가능한 것이다.그리고 본동인 <당마리(당말)>는 옛날 당집(귀신을 모셔놓은 집, 무당이나 화랭이(화랑이)들이 굿을 하는 곳)이 있어서 <당마을>인데 <당마리>로 굳어진 것 같은데 확인 할수는 없었다. 우리지방 토박이 말에
<마실>,<마리(말리)>,<말기>,<말>은 모두 마을을 가리키고 있으니 
<당말>과 <당마리>는 당(堂 집)이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지명임이 분명하다. 마을 앞에 낙동강이 길게 감돌아 흐르고 길쭉한 늪이라서<진늪>,정동향이라서 <동방늪> 등 자연호수 여러개가 있었는데 둘막이(제방)로 모두 없어졌다. <당마리>와 <감마> 사이 나직한 산줄기에는 시대를 헤아릴 수 없는 고총10여기가 있고 또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도수꿈><역노꿈>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당말> 바로 뒷산이 유명한 비룡산인데 이곳 사람들은 흔히 <이감산>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 고을안 삼대명산으로 손꼽히고 있는 이감사묘가 있어서 그만<이감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묘비를 직접 확인하니 <조선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광주 이원록지묘>라 돼 있다. 아마 감사(관찰사)를 지내고 대사헌(종2품)에 올랐던 분이라 짐작된다. <당마리> 마을에 처음 정착하기는 창녕 조(曺)씨고 그 뒤 담양 전(田)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은 전씨35집, 조씨와 이씨가 각각 서너집씩 손과 홍씨도 한집씩 43집이 오순도순 살고 있다. 전씨 중의 낙애정, 홍씨 문중의 만산정이 남아 있다.



부곡마을
면소재지(방계)에서 오리남짓 낙동강물이 저만치 바라보이는 작은마을이다. 
오운마을을 지나 큰골산 등대넘어 깊숙이 들어 앉은 마을인데 마을 뒷산 잘록한 고개가 있다. 이고개가 <까막꼬>로서 신반,유곡쪽으로 통하는 산길인데 마을이름도 이 고개에서 유래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런데 까마귀골 - 까막골-가막골(가막실)-가말 등으로 변음변천 된 것이며 까마귀가 흉조라는 의식 때문에 오곡을 부곡으로 바꾸었다는 설명도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옛날 강물이 넘쳐서 집마당까지 물이 들었고 마을은 사방으로 막혔던 침수지역인데 오직 북쪽 산고개<까막꼬>만이 외부로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신반 닷새장을 보기 위해 넘어다닌 재라서 흔히 <장꼬(장고개)>라고도 부른다. 
이 고개 옆에 묵은 묘가 있으며 일제침략기 이후 공동묘지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 까막까치가 많이 모이는 곳이며 그 아래 골에는 겨우살이 덩굴이 많아 자생하여 <인동골>이라 부른다. 까막재 먼당에 큰 정자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한말 우국지사요 백산선생의 족형으로서 동학혁명에도 깊이 관여하신 안교리 선생이 손수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까마귀가 이 까막재에서 도망쳐 숨을 때는 오은골(烏隱인데五雲으로바꿈)이고 잠 잘때는 오소말(烏巢인데 五所로 바뀜)이란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솔직히 골이라고 <가느족골> 돌감나무 산죽이 많아서 <감죽골>,강쪽으로 <큰골><작은등골><잡동골><대밭골>등 골이름은 그대로 불리고 있다. 마을어귀에 <삼밭골>이 있었다. 한취정은 안악 이(李)씨 재실이다. 잡동골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건했다. 안악 이(李)씨가 터줏대감으로 8집이고 담양 전(田)씨. 김해 허(許)씨. 김해 김(金)씨가 두집씩 모두 15가구가 살고 있다.




아근마을
이곳 사람들은「아근이」라 부르는 양지땀, 음지땀 마주보고 있는 아늑한 골과 웃개(상포)바로 밑에 있는 크지 않은 마을이다. 강뚝이 가깝고 무듬이(수침) 지대라서「아근」이라는 한자 마을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지금 길(道)로 쓰는 돌방천이 바로 물막이뚝 이었으니 바로 문턱앞에 강뚝이었기때문이다. 동북이 트인채 강이 시퍼렇게 앞을 막고 뒤쪽은 나직한 산이다. 이 마을에 딸린 작은 땀인 가래골은 가래(곡식을 퍼 던지는 농구의 한가지)를 닮은 아죽 솔찍한 골짜기라서 붙여진 지명이고 이 가래골 마을에는 서너집만 남아 살고 있으며 또 산에 가래나무(楸木)가 많이 자생해서 소지명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두 가지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객관적인 사실을 발견 확인할 수가 없었고 증언도 엇갈렸다. 마을뒤 나직한 고개가 웃개고개로 삼포로 통하는 산고개인데 산중턱에 몽헌이동주공(진사)의 묘소가 있어서 흔히「진사꼬」(진사고개)로 부른다. 그 옆 깊은 골이「절투우」,「절투꿈」(절터를 말함)내제로 통하는 내제꼬 또는 나직꼬로 부르는 산고개는 나직한 고개 또는 내제로 넘어간다는 뜻이며 옛날에는 가래실을 지나서 신반장으로 나들이를 하였다고 한다.앞으로 흐르는 샛강과 나루만 건너면 큰강(낙동강)이 경계로 합천과 창녕땅 3군 경계지점인데 지금은 그 나루가 없어졌다. 아근 부락은 지금도 이 마을 학생들은 상고개 두개를 넘어서 10리길을 시간반정도 산길을 걸어야 학교(낙서초등학교)를 갈수 있었다고 한다. 가래실 마을은 옛날 15집 넘게 살았는데 대곡제방때문에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말하는 노인도 힘없는 이야기를 하신다. 이 마을에는 현재 26호가 옛터를 지키고 순박하게 살고 있으며 그중 김해김씨가 13집으로 제일 많고 벽진이씨 8집, 여타 성받이가 한두집씩 혈육사이나 다름없이 의좋게 상고있다.





상포마을
면소재지에서 채 닿기 전 <오오티고개> 밑에서 북동쪽 산길로 십리는더 된다. 산등성이 고갯길로 한참 가면 이진사<몽헌 이동주님>의 무덤이 있다해서 <진사꼬> 라 부르는 산고개가 있다. 거기서 보면 마을이 보이는데 큰 강을 끼고 있는 갯마을로 양지편과 응달뜸으로 나누어져있다. 마을 앞이 바로 낙동강이고 옆으로 흐르는 작은 강을 <샛강(사이강)>이라 한다. 서북쪽으로 적포나루와 긴 철교가 보이고 강 건너는 창녕땅이다. <웃게>란 지명은 한자의 훈을 따서 부르는 말이다. 

上(웃상, 윗상), 浦(개포, 물가포) 그대로인 셈이고 옛 문헌에는 이곳을 <우질포>라 돼 있다. 부림면에서 동으로 시오리 지점인데 세간천과 낙동(낙동강을 낙강이라고도함)이 합류하는 곳이라고 적혀 있으니 상포또는 상포진이란 지명은 훨씬 뒤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창녕.대구 합천지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정면 성산을 기준으로 보면 의령지역 나루터로는 가장 위에 위치하는 곳이라<웃개> 즉 가장 위(상류쪽)의 나루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골안에 마을이 형성돼 있는데 양지편, 음지편으로 뜸이 나누어진다. 양지편 뒤를 막고 있는 산이 <부엉등>인데 옛날에 부엉이 (목토,치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음달뜸 뒤로는 나지막한 고개라서<나질고개(나직고개)>와 갈나무(떡갈나무)가 많아서 <갈고개(갈꼬)>란 산고개가 있는데  요즘도 사람들이 이용하는 지름잿길이란다. 재 하나를 넘으면 <아근>마을과 <가래실>이다. 산골짜기 다락논이 있고 물길이 좋다는 <논골>,높은 덤이 양쪽으로 갈라져 방아의 디딜가지 모양이라고 <방아덤>,산도(육지)밭이 있어<산도밭골>, 샛강옆에 열길도 더 되는 덤 중간에 은동이가 박혀 있다는 <은동오덤> 도 유명하다. 시렁처럼 높고 긴 논배미라고<살랑담> 등 재미있는 지명들이 남아 쓰이고 있었다. 낙동 물가운데 잠겨있는 쌍둥이 바위는 가뭄때만 볼 수 있는데 짐승뿔 같아서 <불시덤>으로 부른다. 광복후 전국적으로 이름났던 특산물<상포마늘>은 어른 주먹만한 대산(大蒜)이었는데 입고병 때문에 몇 해 못넘기고 망해 버렸다고 한다. 



신기마을
마을 밖 산자락가에 달성 빈씨 효자각이 있는데 백화당 빈세홍공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고자 정조때 동몽교관 조봉대부란 증직과 함께 정문을 내린 것이다. 먼저 자리 잡은 달성 빈씨, 그 뒤에 동래 정(鄭)씨,김녕김(金)씨가 들어왔는데 지금은 빈씨, 김씨, 정씨 3성이 6집씩이고 해주 오, 벽진 이, 남평 문, 달성 서, 진양 강, 함안 조, 경주 최씨가 겨우 한두집 씪이라 마을전체가 28집이다.

정동(우무실)에서 조금만 가면 새터라는 마을이 있는데 옛날에는 긴늪이 있다고 <진늪>이란 소지명인 때도 있었다. 나직한 묏등이 마을앞에 있는데 이 산의 주위 사방으로 물이 들었고 묏등만 남아서 물에 떠 있는 연꽃과 같다고 해서 연화부수(蓮花浮水)라 하고 철성 이씨 선대묘가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옛날에는 주위의 여러 곳 늪에는 연꽃이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열서집 사는 마을을 연화동이니 연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저만치 동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가 남지땅인데 외목나루 또는 오목나루라고 한다. 이 마을은 도랑이 없는 마을로 유명하며 물이 들 때 뒷산에서 내려다보면 꼭 배를 닮았다. 앞들을 신기들 또는 새들이라하고 진늪이 있던 자리도 메워져 옥답이 되었다. <뚝밑들>이니<진늪들>이라고 하며 지금도 100여평은 물굼티 늪지대로 남아 있다. 
일찍이 평산 신(申)씨가 들어올 때만 해도 모래밭에 샛대만 무성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 뒤 밀양 손씨가 들어오고 이어서 여러 성바지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밀양 손씨가 대성을 이루어50여호중 17호를 차지하고 초계 정씨 11집,파평윤씨 5집, 경주 최,담양 전, 김해 김씨가 각각 4집씩이며, 그외 여러 성바지가 한 두집씩 분포되어 있다. 철성이씨 문중의 연호재가 있고 낙서 초등학교가 있다.



감곡마을
낙서면 내제리에 속한 협동에 감곡(감실)이라는 작은 동네가 있다. 내제마을에서 낮은 산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이 재가 쉰재이다. 떡고개니 수문이꼬(숨이꼬 또는 심이꼬라고도 발음함)등 그리 높지 않은 산고개가 여러 개 있다. 동네 앞은 낙동강물이 흐르고 안산이라 할 수 있는 나직한 산꼭대기에는 임비장묘 또는 임장군묘라고 부르는 큰묘가 있다. 이 묘는 통덕량을 지낸 임여상공의 묘소이다. 이 마을 지명유래 사람이 들어와서 살때부터 산자락에 수백살된 큰 감나무가 있었다고 하며 감나무골 또는 감실이 되었으며 한자로 음(독음)이 같은 것을 찾아 쓰면서 감실 또는 감곡으로 했다고 한다. 위쪽에 자리잡은 웃감실(감실웃땀)에 다섯집이 살고 당산나무가 있는 골안마을 아랫감실(감실 아래땀)에는 여남 집이 살고 있었는데 동구 밖에 대문기둥처럼 버드나무거목이 있고 그 부근을 조산껄이라고 부른다. 내제에서 감곡으로 통하는 나직한 산고개를 수문이꼬라고 한다. 이 말은 내수와 강물을 조절하는 수문이 있어서 붙은 지명이다. 지금 웃감실에는 김씨가 서너집, 홍씨, 이씨가 각 한집씩 살고 아랫 감실은 김씨가 6집, 빈씨가 2집 남아있다. 2005년 7월 20일 조례개정으로 행정마을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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